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4세 (문단 편집) === [[자연국경]]설? 그리고 잇따른 [[전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Adam_Frans_van_der_Meulen_-_Louis_XIV_Arriving_in_the_Camp_in_front_of_Maastricht_-_WGA15110.jpg|width=100%]]}}} || || 불란 전쟁 중 마스트리흐트 공성전을 지휘하는 루이 14세.[br]아담 프란츠 판데르묄렌 작, 1675년 || 흔히 루이 14세가 고대 [[갈리아]]의 영토와 같은 자연국경을 프랑스의 국경으로 삼고자 공격적인 팽창을 했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이 이론은 [[19세기]]에 알베르 소렐이 주장한 이론이고, 이 주장은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소렐의 연구 이후 학자들은 루이 14세의 국경 정책이 국경을 따라 방어하며 오갈 수 있는 지역을 확보하는 것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즉, 루이 14세 시절의 '''자연국경'''이라는 용어는 필립스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가 있는 [[라인강]]이나 [[포#s-5.2|포 강]]의 카살레처럼 강 건너편에 대한 영토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를 암시하는 것으로 봐야 하며 오히려 라인강을 통째로 프랑스 국경으로 삼자는 자연국경설은 오히려 [[부르봉 왕조]]를 무너트린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존 린(John Lynn)은 루이 14세가 주도한 다섯 번의 전쟁을 비롯한 프랑스의 대외정책 전반이 당시 국제 정치 체제의 틀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즉, '''[[갈리아]] 국경 복원'''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루이 14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참조 Cathal Nolan, Wars of the age of Louis xiv 1650-1715(2008), John Lynn, The wars of louis xiv,1667-1714(1999)] '''1667년 ~ 1668년 귀속 전쟁''': 루이 14세가 군제개혁으로 강해진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진격하여 플랑드르 대부분을 석권하는 성과를 보여주었으나 프랑스의 성과에 놀란 네덜란드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스웨덴 제국|스웨덴]]과 함께 삼중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압박했고 카를로스 2세의 섭정이었던 카를로스의 어머니 마리아나가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프랑스를 고립시키자[* Silvia Mitchell, Mariana of Austria and the Government of Spain(2019) ] 루이는 플랑드르의 12개 도시만 차지한다는 엑스라샤펠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배신에 격노한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응징하고자 했다. '''1672년 ~ 1678년 네덜란드 전쟁'''과 '''1683년 ~ 1684년의 재결합 전쟁''': 1670년에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점령했고 잉글랜드와 스웨덴을 네덜란드와의 동맹에서 이탈시키고 오히려 프랑스의 동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튀렌 원수의 작전에 따라 루부아의 개혁으로 증가한 13만 병사를 이끌고 루이는 네덜란드를 기습해서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수문이 열리고 [[프랑스 해군]]이 패배하면서 [[암스테르담]]으로의 진격은 막혔다. 이때 네덜란드는 프랑스에게 [[브라반트]]와 [[마스트리히트]]를 양도하겠다고 했으나 루이 14세는 오만하게도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고 분노한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결국 [[윌리엄 3세|오라녜 공 빌럼 3세]]가 정권을 잡고 스페인-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보급선을 끊어버리자 프랑스는 네덜란드 본토에서 철수했고 프랑스는 네덜란드 정복을 포기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 [[알자스]]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1674년부터 프랑스는 많은 플랑드르 영토와 프랑슈콩테 전역을 확보했고 1677년에는 [[카셀]]에서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대승을 거두어 프랑스는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해서 보방이 필요하다고 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오랬동안 프랑스가 눈독들이던 프랑슈콩테 합병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루이는 1678년의 네이메헨 조약이 프랑스가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다고 판단하여 재결합 회의소를 점령지에 설치하여 강제로 주변지역을 합병하기 시작했고 제국도시 스트라스부르를 강제로 합병하자 [[신성 로마 제국]] 전역이 프랑스를 적대했고 여기에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의 [[제2차 빈 공방전|빈 포위]]를 오히려 부추긴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었다.1684년 [[레겐스부르크]] 휴전으로 프랑스는 "재결합" 영토와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점령을 인정받았으나 이제 프랑스의 동맹국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만 남았다. '''1676년 ~ 1688년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보방]]의 요새화 정책''': 프랑스는 오랫동안 수도 파리가 국경 가까이에 있어 전쟁에서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상태에서 루이는 보방에게 프랑스 국경을 철저하게 요새화시킬 것을 명령했다. 보방은 기대에 부응하여 프랑스 국경을 철의 국경으로 만들었다. '''1688년 ~ 1697년의 [[9년 전쟁]]'''과 '''스페인 분할 협상''': 1688년부터 오스만 제국이 본격적으로 신성동맹에 밀리기 시작하고 가을이 되자 [[베오그라드|벨그라드]]까지 상실하자 루이 14세와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죽음 이후 권력을 장악한 루부아 후작은 매우 불안해졌고 이에 레겐스부르크 "휴전"을 "조약"으로 바꿀 것을 레오폴트 1세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하고 오스만 주재 프랑스 대사 피에르 지라르댕이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알리자 다급해진 루이 14세는 [[팔츠 선제후국]]을 침공하여 오스만 제국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전 유럽이 프랑스를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은 전 유럽이 프랑스를 대적하게 만들었고 결국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함께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했다. 프랑스군은 군제개혁으로 강해진 상태였고 국경을 요새화시켜두었기 때문에 전 유럽과의 전쟁에서 야전에서는 승리했으나 경제가 버티질 못했고 대기근으로 프랑스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루이는 결국 로렌, 룩셈부르크와 재결합 영토 대부분을 반환한다는 레이스베이크 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오스만의 붕괴를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경제가 초토화되어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했고 이 사실을 잘 알던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죽음이 임박하자 1698년 헤이그 조약에서 [[그랑 도팽 루이]]에게 [[기푸스코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떼주고 나머지 지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차지한다는데 동의했고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급사하자 1700년 런던 조약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카를 대공]]에게 그랑 도팽 루이에게 할당된 기푸스코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제공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런데 카를로스 2세는 분할 조약 소식에 불쾌해했고 카스티야 귀족들이 강력하게 부르봉 왕조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데다가 스페인 분할을 막기 위해 전 유럽을 상대로 버틴 프랑스라면 스페인을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고 만일 스페인 영토를 분할할 시 왕위가 취소된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사망했다. '''1700년 ~ 1714년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카를로스 2세의 유언장 내용을 들은 루이 14세는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만일 유언장을 받아들이면 당연히 전쟁이 터질 것이 자명했고 이미 경제가 약해진 프랑스로서는 버티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처음에는 유언장을 거부하기로 했으나 평소에는 무기력하던 [[그랑 도팽 루이]]가 자기 아들을 위해 유언장 수락을 강력하게 요청하자 루이 14세는 결국 유언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부르봉 왕조와 아들, 손자를 위한 것일 뿐 프랑스의 영토확장 야심은 전혀 없다고 전 유럽에 알렸으나 문제는 루이 14세가 미쳤는지 스페인을 프랑스의 속국처럼 부리자 당연히 루이 14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는 이미 전쟁을 선포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와 더불어 [[프랑스 왕국|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고 결국 프랑스는 또 전쟁에 휘말렸다. 루이 14세는 프랑스가 [[9년 전쟁]] 시기 전 유럽을 상대로 버텼고 이번에는 [[스페인 제국|스페인]]-[[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도 동맹인데다가 방어전이어서 프랑스가 도박을 벌일 만 하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프랑스군]]이 너무 허약해진 상태였다. 튀렌, 대 콩데, 뤽상부르는 이미 죽었고 빌라르, 베릭, 방돔이라는 뛰어난 원수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전임자들의 능력에 훨씬 못 미쳤다. 결정적으로 이전에 강력했던 프랑스 보병은 이미 잉글랜드 보병에 밀리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의 핵심인 기병은 경제난으로 약해져서 잉글랜드 기병에게 밀렸다. 결국 프랑스의 카드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이었지만 전선이 너무 많아서 숫적우위를 활용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초반에는 바이에른군과 함께 [[빈(오스트리아)|빈]]을 위협했으나 1704년 [[블레넘 전투|블레넘에서]] [[존 처칠|말버러 공작]]의 기병돌격에 털렸고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에 정복당했다. 그래도 빌라르, 방돔 원수의 활약으로 1706년 초반까지는 다시 동맹군을 밀어붙이다가 [[라미예 전투]]에서 루이 14세의 빌레루아 원수 신임으로 인해 또 말버러 공작의 기병에 털린 프랑스군은 플랑드르를 내주고 본토가 위협당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라 푀이야드 원수의 삽질로 [[토리노]] 함락은커녕 [[토리노 공방전]]에서 털리면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부르봉 동맹군의 영향력이 일소당했다. 그래도 베릭 원수의 활약으로 이베리아 전선에서는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708년 프랑스는 공세로 나섰으나 [[프티 도팽 루이]](부르고뉴 공작)의 삽질로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의 기병에게 또 털렸고 때마침 찾아온 1708~1709년 겨울의 대한파[* 지난 500년간 유럽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고 한다.]로 인해 대기근이 돌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60만 명 넘게 사망하는 등 전국이 초토화되자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진 루이 14세는 사실상 항복의사를 동맹군에게 전달했다. 루이 14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정복한 모든 영토와 스페인 왕위를 포기할테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앙주 공작 필리프를 앉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동맹군은 루이 14세에게 둘째 손자를 강제로 쫒아내라는 모욕적인 요구와 함께 프랑스를 사실상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추가요구를 했고 루이 14세는 이 요구만은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랑스인]] 백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에 손자를 쫒아내라는 요구 말고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했으나 동맹군은 거절하고 [[파리(프랑스)|파리]]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동맹군에 분노한 프랑스인들이 모금 운동과 함께 자진입대를 하고 프랑스군이 [[말플라케 전투]]에서 에서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동맹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전쟁에 염증이 난 영국인들은 전쟁을 지속하자는 휘그당을 버렸고 여기에 [[요제프 1세]]가 죽고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즉위하자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너무 강해질 것과 프랑스가 계속 버티는데 성공하자 부담을 느낀 영국은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이퍼르, 니우포르트, 투르네 등을 할양하고 프랑스가 스페인을 합병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는 대신에 이전에 프랑스에 요구했던 정복지 완전반환과 스페인 왕위를 카를 6세가 물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취소했다. 남은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은 다시 파리를 향해 진군했으나 빌라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드냉 전투]]에서 패배하자 네덜란드는 전쟁에서 이탈했고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라슈타트에서 단독강화를 맺으며 전쟁은 드디어 종결되었다. 전쟁에서 프랑스는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고 특히 재정이 심하게 망가져 이후 수십년동안 이를 회복해야 했고 프랑스군이 더 이상 유럽에서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플랑드르 일부를 제외한 정복지를 지켜냈고 오랑주 공국과 같은 일부 영토를 오히려 추가한데다가 합스부르크 포위망을 드디어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